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 왕조 (문단 편집) === [[아나스타시우스 1세]](491~518) === 491년 4월 9일 제노가 사망한 뒤, 아사우리아인들에게 신물이 난 시민들은 황후 [[아일리아 아리아드네]]에게 로마인 황제를 세워달라고 요구했다. 아리아드네는 에피루스 노바 속주의 재무관을 지내며 탁월한 재정 관리 능력을 보여줬던 환갑의 노인 아나스타시우스를 4월 11일 황제로 택하고 그의 황후가 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독실한 [[단성론]] 신자였기에 정통 교회의 반발을 샀지만, 아나스타시우스가 황제로서는 [[칼케돈 공의회]]를 따르겠다고 약속하자 교회도 받아들였다. 492년 제노의 동생 [[플라비우스 롱기누스]]가 이사우리아인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수년간의 전쟁 끝에 497년 진압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탁월한 재정 관리 능력을 황제가 되어서도 유감없이 보여줬다. 497년부터 납세의 기준을 현물이 아닌 화폐로 통일하여 재정을 개선하였고, 기존의 불안정한 구리 합금 경화를 순수한 동전인 폴리스로 교체했다. 화폐 사용 확대와 부패에 대한 강력한 처벌로 중간 관리들의 착복이 줄어들었고, 백성의 살림이 나아지는 동시에 국가의 세수도 증가했다. 황제는 이렇게 개선된 재정을 토대로 군대를 육성한 뒤 전쟁을 단행해, [[사산 왕조]]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다. 또한 [[디라키움]]과 다라에 대규모 요새를 건설하여 서쪽의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의 위협에 대비했다. 그리고 507년부터 512년까지 트라키아 반도에 56km에 달하는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건설하였다. 내치와 외정 모두 큰 성과를 거두자, 512년 [[단성론]]을 교회의 교리로 삼으려 시도했다. 그러자 513년 트라키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플라비우스 비탈리아누스]]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황제는 단성론 도입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고, 반란은 515년 말에 토벌되었다. 518년 7월 9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근위대장 유스티누스가 근위대의 추대와 [[원로원]]의 동의로 새 황제로 등극하면서 [[유스티니아누스 왕조]]가 역사에 등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